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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가 이야기

빈센트 반 고흐. 실패의 삶 속에서 꽃 피운 예술

by 아트랑 2024. 3.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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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센트 반 고흐 / 자화상 '1887'

 

 

빈센트 빌럼 반 고흐(Vincent Willem van Gogh) /1853년 3월 30일 ~ 1890년 7월 29일 /향년 37세

 

 

- 미술사에 빛나는 존재로 남아있는

빈센트 반 고흐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

 

 

작품 세계

 

빈센트 반 고흐는 네덜란드의 후기 인상주의 화가로  37세라는 짧은 생애를 살았지만 가장 위대한 예술가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예술가의 길을 선택하고 죽기 전 10년 동안 900여 점의 그림들과 1100여 점의 습작들을 남겼는데 살아있는 동안 성공을 거두지 못 하고 사후에 인정받게 됩니다. 그래서 그의 삶을 살펴보면 여러 감정들을 느낄 수밖에 없는데 그의 작품과 함께 그러한 배경까지도 다른 여러 방면의 예술가들에게 크나큰 예술적 영감을 주게 됩니다. 

 

그는 주로 인물, 풍경, 꽃 등을 다루었으며 색상과 브러시의 터치로 내면의 감정을 표현했습니다. 초기 작품은 하층민의 일상과 생활을 주로 그리며 어둡게 표현하였으나 인상주의 화가와 신인상주의 화가들로부터 영향을 받고 화풍이 밝아집니다. 사실주의와 표현주의를 혼합하여 표현하였고 정물화,인물화와 풍경화 등을 그렸는데 훗날엔 풍경화를 많이 그렸습니다.

 

전문적인 미술교육을 제대로 받은 적이 없는 고흐는 수많은 예술작품을 관찰하고 연습하여 그림 실력을 키웠고 자신만의 내면세계를 그림으로 표현하려 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화풍은 독특하고 특색이 있습니다.

 

그는 인생에 있어 좌절과 고통이 계속되었고 예술가의 길을 선택한 이후에도 정신적 안정을 찾지 못하여 정서적 고통에 시달리는데 이러한 내면적 감정과 정서가 그의 작품들 속에 묻어납니다.

 

그가 사망했기에 작품에 대한 작가의 생각이나 이해가 부족할 수 있었으나 우애가 좋았던 동생 테오와의 편지 속에서 고흐의 작품에 대한 설명과 내면적 감정 표현의 이유 등을 알 수 있게 되는데 그래서 고흐의 작품은 더욱 특별합니다.

미술계뿐만 아니라 여러 예술 분야에 많은 영감을 준 고흐의 작품은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과 함께 치유와 위로를 선사합니다.

고흐의 작품은 20세기 미술 운동인 야수주의와 독일 표현주의의 발전에 영향을 줍니다.

 

 

성장배경과 삶. 그리고 예술

 

빈센트 반 고흐는 1853년 3월 30일 네덜란드 남부 노르트브라반트주 쥔더르트에서 네덜란드 개혁교회 목사인 테오도뤼스 반 고흐와 아나 코르넬리아 반 고흐카르벤튀스 부부 사이에서 태어납니다. 고흐가 태어나기 전 태어나자마자 죽은 형이 있었는데 형의 이름도 빈센트 빌럼으로 고흐와 이름이 같아 고흐는 형을 대신해 살고 있다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고흐가 태어난 후 2년 뒤 여동생 아나 코르넬리아가 태어났고 2년 뒤 남동생 테오가 태어납니다. 그 후 엘리사벳 휘베르타 리스, 빌레미나 야코바 빌, 코르넬리스 빈센트 코르가 태어나 고흐는 5명의 동생을 두게 됩니다. 그 중 바로 아래 두 동생과 가깝게 지냈는데 특히 테오는 고흐에게 평생의 친구이자 동반자 같은 동생이 됩니다.

 

1864년 고흐가 11살이 되자 부모는 제벤베르헌의 개신교 교사가 운영하는 기숙학교에 보냅니다. 그곳에서 그는 프랑스어와 영어를 유창하게 말할 정도로 배우게 되고 독일어도 상당히 능통한 수준으로 익힙니다. 제벤베르헌에서 기초교육을 마치고 13살이 된 1866년에 틸뷔르흐의 빌럼 2세 국립 중학교에 진학하는데 이곳은 미술이 교과 커리큘럼의 하나로 도입되어 있어 이곳에서 미술수업을 받게 됩니다. 그런데 1868년 갑자기 학교를 자퇴하게 되는데 정신적인 문제나 발작이 있지 않았을까라는 추측을 합니다. 이는 고흐의 집안에 정신병력이 있었는데 고흐에게 유전되었을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16세가 되었을 때 큰아버지 센트의 주선으로 헤이그의 구필 화랑에서 화상으로 일을 시작합니다. 이곳에서 밀레의 그림을 접하게 되는데 크게 감동하여 밀레를 밀레 사부라고 부를 정도로 존경하며 그의 미술에 영향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1876년 화랑에서 해고당하게 됩니다. 이는 화랑의 런던지점을 내기 위해 런던에 파견되었을 때 발전한 런던의 모습과 대조적인 가난하고 비참한 현실의 런던 노동자들에 대한 충격과 하숙집 주인의 딸인 외제니 로예에게 실연당한 아픔 등이 밑바탕이 되어 화랑에서 취급하는 작품들의 가치에 대해 동감하지 못하게 되고 미술의 관점에 대해 손님과 논쟁이 잦아지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정신적인 증세도 영향을 끼쳤지만 여러 정신적인 충격에 대한 해답을 찾으려고 종교에 매달린 것도 해고의 원인으로 보입니다.

 

고흐는 구필 화랑을 그만둔 후 종교적 열정에 사로잡혀 종교인으로 가난한 이들을 위해 살아가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영국의 램스게이트라는 곳의 학교에서 무급 교사로 일하게 되는데 잘 적응하지 못하고 그만둡니다. 그러던 중 영국 감리회 소속의 목사를 만나 그의 보조 목사 겸 목사의 학교에서 조수 교사로 채용되어 일하게 되는데 조울증이 찾아옵니다. 이 때문에 보조 목사직을 그만두고 다시 네덜란드의 가족에게 돌아옵니다. 아버지는 형 센트에게 부탁하여 도르트레흐트 근처 서점에 일자리를 얻어 주는데 서점일에 흥미가 없었던 고흐는 그 일에서 쫓겨납니다.

 

1877년 다시 집으로 돌아온 고흐는 목사가 되겠다고 하여 암스테르담에서 존경받는 신학자이자 이모부인 요하너스 스트리커르에게 가서 신학 입학시험을 준비했는데 실패합니다. 그 후 브뤼셀 근교 라켄에 있는 개신교 선교 학교에서 3개월 과정을 보내고 전도사 시험에 합격하지 못했지만 벨기에의 탄광지대인 보리나주로 파견됩니다. 

 

1879년 벨기에 보리나주에 있는 가난한 광산촌 쁘띠와스메스에서 평신도 선교사직을 맡은 고흐는 열악하고 비참한 환경 속에서 자신도 광부들과 같은 비참한 환경으로 밀어 넣었고 그 지역 광부들에게 헌신하는 그의 노력은 계속 되었지만 그러한 고행과 같은 삶은 선교 단체에서 나온 시찰관 눈엔 부적절하게 보였습니다. 선교단체에서 해고 당한 고흐는 아는 목사의 중재로 보리나주에 있는 퀴엠으로 돌아와 무급으로 선교를 다시 시작합니다. 고흐는 이때부터 성직보다는 미술에 관심을 더 기울이게 됩니다. 주변 사람들과 주변 환경, 장면 등에 관심을 갖게 되고 보리나주 사람들의 비참한 현실도 그리고 싶어했습니다. 본격적으로 미술을 시작하자는 남동생 테오의 제안에 따라 1880년 10월 보리나주를 떠나 브뤼셀로 가게 됩니다. 테오는 화상의 길을 걸으며 고흐의 예술 활동을 지원해 줍니다.

 

1880년 11월, 테오의 설득으로 브뤼셀 왕립 미술 아카데미에 입학했으나 혼자 그림 그리는 것을 더 좋아한 그는 다음 해 4월 그만두고 그때부터 독학으로 실력을 쌓기 시작합니다. 그의 외사촌이자 화가였던 안톤 모베에게 몇 년간 그림 지도를 받았으나 그가 시엔이라 불리는 매춘부와 동거하는 사실을 알게 된 후 연락을 끊습니다. 시엔은 매춘부인데다 딸이 하나 있었고 임신한 상태였는데 고흐는 소외되고 사회에서 버림받은 사람들에 대한 애정을 갖고 있었고 그녀의 비극적이고 안타까운 상황이 고흐에게는 그녀에게 더 끌리는 요소가 되었습니다. 가족 모두의 반대와 지인들의 반대 특히나 정신적, 물질적으로 지원해 주던 동생 테오 마저도 반대하고 시엔도 매춘부의 생활로 돌아가려 하자 큰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헤어지게 됩니다.

1883년 노스트브라반트주 뉘넌의 부모님 집에 들어가 그림에 몰두합니다.이 시기에 수채화 여러 점과 유화 200점 정도를 남기는데 대부분 어두운 색상을 사용하여 작품들을 어둡게 구성하였습니다.

1885년 3월 심근경색으로 고흐의 아버지가 사망하고 그 해 11월 안트베르펜으로 이사하는데 경제적으로 어렵게 생활합니다. 이때까지 자신의 작품이 한 점도 팔리지 않았기에 테오가 자신의 작품이 어둡고 인기가 없다는 말을 기억하고 채색을 연구합니다. 그리고 일본에서 들어온 우키요에 목판화를 구입하는데 그 영향을 받아 어두운 화풍의 인상주의가 밝은 화풍으로 변화하기 시작합니다.

1886년 3월에는 파리에 있는 테오의 아파트로 이사하는데 그곳에서 인상주의 화가들과 신인상주의 화가들로부터 큰 영향을 받습니다. 그 후 프랑스의 시골마을 아를로 이사하여 추구하던 대로 밝은 화풍의 작품들이 그곳의 밝은 햇살로 인해 순조롭게 나오게 되었고 그곳에서 화가들의 공동체를 만들고자 하였습니다. 그의 제안에 폴 고갱이 이에 응하여 고흐와 함께 생활하게 되었는데 두 사람의 성격 차이와 그림에 대한 관점 차이로 불화가 일어나게 됩니다. 결국 1888년 12월 23일 고흐는 정신적 발작을 일으켰고 면도칼로 자신의 귀를 자릅니다. 이 때문에 아를 시립병원에 입원하게 되는데 그림을 그리고 싶어하는 고흐의 태도를 병원에서 긍정적으로 보고 퇴원시켜주지만 시민들의 민원으로 다시 입원하게 됩니다. 고흐는 병원과 주변인들에 대한 불만으로 테오에게 다른 정신병원에 가고 싶다고 부탁하여 생레미의 생폴 요양원으로 가게 됩니다. 이곳에서 그렸던 작품들이 고흐의 후기 걸작으로 불리는 '별이 빛나는 밤'이나 사이프러스 나무를 소재로 한 작품들입니다. 또 이 시기가 유일하게 작품이 팔린 시기였고 몇몇 전시회에서 그의 그림이 초청받고 호평받아 서서히 이름을 알려졌던 시기입니다. 그러나 화가가 된 후 경제적으로 독립하지 못하고 동생 테오에게 짐이 되고 있다는 생각과 건강 악화로 인해 주기적인 발작과 비관적인 생각 등으로 정신적 부담이 컸다고 합니다. 

 

생레미 요양원에서 퇴원 후 테오는 고흐의 거처를 파리에서 가까운 작고 조용한 마을인 오베르쉬르아즈로 옮겨 줍니다. 오베르는 밀밭과 자연 풍광이 좋아 그림 그리기에도 좋았고 예술가와 가난한 자들에 대한 경험이 많은 정신과 의사 폴가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1890년 7월 27일 약해진 몸과 정신을 이겨내지 못하고 고흐는 권총으로 자살을 기도합니다. 아슬아슬하게 심장을 빗나가 총알을 빼내었으나 이틀 뒤 1890년 7월 29일 결국 숨을 거둡니다. 동생 테오는 이 소식을 듣고 형을 만나 형의 마지막을 함께 했는데 너무 비참하게 죽은 형의 죽음에 충격을 받아 정신병이 생겨 형의 죽음 후 6개월 후에 형을 따라 생을 마칩니다. 테오의 아내 요한나 반 고흐는 빈센트 반 고흐의 작품을 세상에 알리고 두 형제의 주고받은 편지와 함께 우애도 세상에 알립니다. 이로 인해 1930년대부터 빈센트 반 고흐는 전세계적으로 유명한 화가가 됩니다.

 

세상에 인정받지 못하고 고난이 많았던 고흐의 삶. 그리고 그 삶을 언제나 격려하고 응원해 줬던 동생 테오.

서로가 서로에게 너무나 끈끈했던 형제의 삶의 마지막이 다른 이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만 세상에 흔치 않은 둘의 형제애는 빈센트 반 고흐의 작품을 더 특별하고 아름답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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