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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가 이야기

황금빛 신비로움 구스타프 클림트

by 아트랑 2024. 3.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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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클림트 / 키스 (1907년) >

 

 

 

구스타프 클림트 / 1862년 7월 14일 ~ 1918년 2월 6일 (향년 55세)

 

 

- 찬란한 금빛으로 모두를 매혹시킨

구스타프 클림트에 관해 알아보겠습니다 -

 

작품세계

구스타프 클림트는  오스트리아의 상징주의 화가이며 아르누보 스타일을 추구하였습니다. 그는 빈 분리독립운동의 중요 구성원 중 하나였으며 작품은 주로 초상화, 풍경화, 누드화가 많고 장식적이며 화려한 패턴, 금박, 에로틱한 이미지가 특징적인 독특한 스타일의 화가였습니다. 장식 회화가 교육을 받았으나 건축 장식 회화에서 벗어나 독자적 화풍을 만들어 갔으며 젊은 시절엔 사실적 회화에 매우 능했으나 장식과 구성이 독특하고 평면적 느낌의 작품으로 변모해 갔습니다.

독창적인 기법으로 황금을 사용했는데 그림에 금박을 넣는 것은 고도의 작업으로 귀금속 세공업자였던 아버지의 영향을 받은 듯합니다. 클림트의 작품은 대담한 주제와 화려한 색채, 그리고 독특한 구성으로 이목을 끌기에 충분하였고 작품을 대하는 이들은 황금빛 화면과 장식에 매혹당하게 됩니다. 

 

클림트의 작품에는 유난히 많은 여성들이 등장합니다. 인체의 표현이나 특히 다양한 연령층의 여성 누드를 서양미술사에서 가장 완벽히 표현한 작가로 알려져 있고 성, 사랑,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관능적 여성 이미지와 함께 황금빛의 화려한  색채로 표현합니다. 한때는 그의 그림들이 포르노로 비판받으며 논란의 대상이 된 적도 있습니다. 생전에 유명 작가이긴 했지만 논란이 있었기에 사후 50년 동안 대중의 큰 관심은 받지 못하였었는데 1980년대 후반 클림트의 작품들이 조명되며 클림트는 세계적인 인기를 얻은 화가가 되었습니다. 한때는 외설로 치부되던 것들이 지금은 아름다운 낭만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자신만의 독창적인 화풍으로 확고한 명성을 얻은 클림트의 작품들은 상품화되어 우리 생활에서도 많이 접할 수 있으며 그 독특함과 상징성은 또 다른 예술가들에게 많은 영감을 주고 있습니다.

 

 

 

생애 그리고 사랑

 

클림트는 1862년 오스트리아 빈 근교의 바움가르텐에서 3남 4녀 중 둘째로 태어납니다. 아버지는 보헤미아에서 이민 온 금세공사였으며 어머니는 빈 출신으로 결혼 전에는 가수였다고 합니다.

 

1876년 14세 되었을 때 빈 응용미술학교에서 회화와 수공예적인 장식 교육을 받았습니다. 1883년 졸업 후에 남동생 에른스트 클림트와 친구 프란츠 마치와 함께 공방을 차려 공공건물에 벽화 그리는 일을 하였는데 빈에 새로 들어선 국립극장과 미술사 박물관에 장식화를 그려 건축 장식 미술의 대가로 알려지고 그들의 명성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1892년 아버지와 동생 에른스트가 뇌출혈로 갑작스럽게 죽자 클림트는 충격을 받고 한동안 붓을 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인간의 운명과 구원에 관해 생각하는 시간을 가졌고 1895년 다시 작품을 시작할 때는 상징주의적 모습을 보입니다. 이후 빈대학교 대강당의  '철학', '의학', '법학'을 상징하는 천장 패널화를 의뢰받게 되는데 교수들의 비난을 받게 됩니다. 그림들을 교정하라는 제의를 거절하여 패널화는 대강당에 걸리지 못했으나 철학의 패널화는 훗날 제4회 파리 만국박람회에서 금상을 수상합니다. 이후 클림트는 공공 작품은 의뢰받지 않았고 기하학적이며 추상적이며 평면적인 양식으로 나아갔습니다. 덕분에 <키스>,<다나에> 같은 황금빛 대작들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1918년 1월 11일 뇌출혈이 있었고 그해 2월 6일 스페인 독감으로 인한 합병증으로 56세의 나이로 숨을 거둡니다.

그가 죽은 후 14명의 여인들이 친자확인 소송을 합니다. 클림트는 평생 혼인하지 않고 많은 여인들과 관계를 맺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어떤 여인과도 가정을 꾸리고 안주하며 살아가지 않았습니다. 그가 진정으로 사랑한 여인은 에밀리 플뢰게라는 여인이었습니다. 그녀는 남동생 에른스트 클림트의 아내의 여동생이었습니다. 에른스트와 그녀의 언니가 결혼을 하면서 클림트를 알게 되었고 그 당시 클림트 29세, 플뢰게는 17세였습니다. 플뢰게는 클림트의 정신적 반려이며 육체적 관계가 없는 플라토닉한 사랑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녀는 평생 결혼하지 않고 독신으로 지냈으며 클림트의 모든 행동을 지지해 주고 이해해 주고 그가 세상을 떠나는 순간 찾았던 단 하나의 여인이자 마지막을 함께해 준 여인이었습니다.

그의 작품 중 가장 유명한 작품<키스>는 에밀리 플뢰게를 모델로 한 것입니다.

에밀리는 클림트가 죽은 후 30년을 더 살았고 죽음 후 그의 무덤 옆에 묻힙니다.

 

 

예술적 성장과 추구

19세기 말에 영국,프랑스 등에서  상징주의 인상파와 같은 진보된 아방가르드 운동을 접하고 상대적으로 낙후된 오스트리아의 미술의 보수적이고 판에 박힌 사상에 반발하여 인간의 내면적 의미를 미술을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빈 분리파'를 만들어 초대 회장으로 추대되었습니다.

그는 '여성'이라는 소재를 통해 여러 가지를 시사하였고 성, 사랑, 죽음 등과 같은 소재도 다루었습니다.

관능적이고 사실적으로 여성을 그려 여성을 가장 잘 표현한 화가로 알려졌으며 금박을 이용한 황금빛과 화려한 색채를 특징으로 합니다.

'빈 분리파'에서 탈퇴 후 장식적이고 화려한 패턴, 모자이크, 금 등을 사용하여 독창적인 양식을 발전시켰고 신비롭고 에로틱하며 화려한 상징주의를 추구하였습니다.

주요 작품으로는 <유디트>, <프리차 리들러의 초상>, <아델레 블로흐바우어의 초상>, <키스>, <아담과 이브> 등이 있습니다.

 

아르누보

아르누보는 프랑스어로 '새로운 미술'이라는 의미이며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일어난 유럽의 예술 사조입니다. 독일어권에서는 유겐트 양식이라고도 불리었으며 꽃이나 식물 덩굴에서 영감을 받은 장식적인 곡선을 많이 사용하는 특징이 있습니다. 아르누보는 고전주의적 미술에서 탈피하고 순수 예술과 응용 예술 사이의 전통적인 구분을 무너뜨리는 것을 목표로 시작된 운동으로 공예, 포스터, 건축 장식, 직물, 보석 등 예술 분야 전반에서  널리 유행하였습니다. 아르누보의 특징으로는  아름다움을 추구하며 장식적이고 미녀가 주로 나오며 평면적이고 선과 면과 색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르누보는 그 당시 전 유럽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오스트리아 분리파 작가들에게 영향을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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