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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가 이야기

다중 천재 레오나르도 다빈치

by 아트랑 2024. 4.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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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 다빈치 / 모나리자(1503)

 

 

 

레오나르도 디세르 피에로 다빈치(Leonardo di ser Piero da Vinci) /

1452년 4월 15일 ~ 1519년 5월 2일 (향년 67세)

 

 

-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거장 레오나르도 다빈치에 관해 알아보겠습니다 -

 

다중 지능적 천재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피렌체공화국(이탈리아)의 예술가로 르네상스시대를 대표하는 거장이며 전 세계적으로 보편적 예술의 기반을 다진 선구자이자 다방면의 지식과 아이디어로 인류 지능의 정점에 도달했다고 평가되는 인물입니다. 

그는 화가였으며 조각가, 발명가, 과학자, 공학자, 건축가, 지질학자, 천문학자, 식물학자, 음악가, 역사가, 의사, 수학자 등등 다방면에서 활동한 다중 천재였으며 외모, 목소리, 신체 등 외적 조건 또한 뛰어났다고 합니다. 이렇듯 엄청난 재능을 갖고 태어나 그 재능을 낭비하지 않고 다방면에 남긴 그의 흔적은 각 분야에서 큰 자료와 토대가 되기도 했습니다. 한 손으로 글을 쓰고 다른 한 손으로는 그림을 그리는 일이 가능했으며 다른 이가 아이디어를 훔쳐 갈까 봐 글을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좌우를 반전시켜 기록하는 필기 습관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의 글을 읽으려면 거울을 비춰서 읽어야 했다고 합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시대를 앞서간 천재 예술가였으며 미켈란젤로와 라파엘로와 함께 르네상스 3대 거장으로 꼽힙니다.

 

 

작품세계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는 아마도 모르는 이가 없을 것입니다.

다빈치는 어떤 인물을 그리고자 할 때 대상의 성격과 본성을 고려했다고 합니다. 여러 가지를 고민하고 결심이 서면 비슷한 사람들이 많이 찾는 장소에 가서 그들의 얼굴, 옷, 움직임 등을 자세히 관찰하고 스케치를 해 두고 그리고자 하는 사람에 대해 충분한 준비를 갖춘 후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한 작품을 하기 위해 수많은 시간을 기울이고 때때로 붓터치 한 번 후 수시간을 주시하며 고심하니 작품을 이어나가는 속도가 빠를 수는 없었습니다. 그런 이유에서인지 완성하지 못한 작품들도 많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런 준비나 세심함 때문에 그의 그림은 정교하고 보는 이로 하여금 경이로움을 느끼게 합니다. 유명 작품으로는 <암굴의 성모>, <기마상>, <최후의 만찬>, <앙기아리 전투>, <모나리자> 등이 있으며 수많은 연구 스케치를 남겼습니다. <인체의 비례>스케치는 인간 비례의 조화와 아름다움의 바탕이 되었고 그 시대 기술로는 구현할 수 없는 헬리콥터, 낙하산, 굴삭기 등 다양한 발명에 기여하는 스케치 등을 통해 그의 과학자나 기술자적 모습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사람과 동물의 해부도를 평생 동안 끊임없이 그렸는데  화가는 해부학에 무지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으며 이는 의학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그린 것보다 훨씬 세밀하고 훌륭한 그림이었습니다.

이런 이유에서인지 그의 작품은 작은 것 하나까지도 너무나 세심하게 표현되었으며 특히 인물의 표정과 모습으로 성격까지 눈에 보이는 듯 표현해 내었기에 모두가 인정하는 예술가로 불립니다.

 

 

생애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1452년 4월 15일 피렌체 공화국 토스타나의 빈치 마을에서 공증인 아버지 안토니오 피에로와 농민이었던 어머니 카타리나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그 둘은 결혼하지 않았기에 레오나르도는 혼외자로 태어났으며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다빈치'는 성이 아니라 빈치(Vinci)출신이라고 해서 붙은 칭호입니다. 태어나서는 어머니 집에 살다가 대여섯살이 되어서 아버지 집에 가서 살게 되었는데 아버지보다 숙부가 자연과 세상을 가르쳐 주고 돌봐주었습니다. 아버지는 레오나르도의 재능을 알고 14살쯤 피렌체로 이사를 가 안토니오 델 베로키오의 공방에 들어가 그림을 배우게 합니다. 20살이 되어 베로키오의 <그리스도의 세례>작품에 조수로 참여해 꼬마 천사 두 명을 그렸는데 그 실력이 너무나 뛰어나 베로키오가 충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이를 계기로 베로키오는 다비치를 화가 조합인 성 루카에 가입시켜 정식 화가가 되게 합니다.

 

그는 그림 실력 자체로써도 출중했으나 새로운 화법의 실험이라는 면에서 높게 평가받습니다. 당시 이탈리아 최초로 기름을 이용한 유화를 시도한 화가였으며 자신의 그림에 새로운 시도를 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1482년 30살인 다비치는 밀라노 공국에서 <암굴의 성모>, <기마상>, <최후의 만찬> 등 여러 작품을 만들었습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서 잠시 베네치아에서 일하다 1500년 피렌체로 돌아옵니다. 1501년 <성 모자와 성 안나> 제단화를 그리고 수많은 연구 스케치와 관찰을 남깁니다. 1503년 피렌체 시청 벽화작업을 의뢰받아 <앙기아리 전투>를 시작합니다. 같은 해 <모나리자>도 시작합니다.

 

 1506년 루이 12세의 요청으로 밀라노에서 작업을 하게 되는데 1513년까지 다양한 작업과 연구를 하면서 지냅니다. 제3차 이탈리아 전쟁으로 교황령의 로마로 가서 교황청 작업을 하게 되다가 1516년 프랑수아 1세의 초청으로 프랑스 루아르 강의 앙부아즈 궁에 머물게 됩니다. 여기서 <모나리자>가 완성되게 됩니다. 1519년 4월 23일 건강 악화로 죽음을 직감하여 유언장을 작성하고 1519년 5월 2일 프랑스 클로 뤼세에 있는 자신의 저택에서 숨을 거둡니다.

평생 독신으로 살았기에 유산은 아끼던 제자 프란세스코 멜지가 상속받습니다.

 

 

르네상스

르네상스는 14세기부터 16세기 사이에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서유럽 여러 나라에서 일어난 문예부흥 혹은 문화 혁신 운동입니다. 르네상스의 의미는 '재생', '부활'이며 기본적인 성격은 고대 그리스, 고대 로마의 복원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옛 그리스와 로마의 문학, 사상, 예술을 본받아 인간 중심의 정신을 되살리려는 점에서 일종의 시대적 정신운동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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