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파엘로 산치오 다 우르비노 / 1483년 4월 6일~1520년 4월 6일(향년 37세)
- 르네상스 3대 거장 중 한 명인 라파엘로 산치오에 관하여 알아보겠습니다 -
성품과 작품
유명한 예술가 중에는 불행한 환경이나 비극적인 사건 등에 의해 괴팍한 성격이나 남들과 소통하지 못하고 자기만의 세계에 갇혀 있어 사회성이 부족한 예술가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성격이 독특한 예술가보다 성격이 좋은 세기에 남을 예술가를 찾기가 더 어렵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라파엘로 산치오는 예의, 근면, 겸손, 배려, 도덕성에 착한 성품까지 지닌 보기 드문 예술가였습니다. 그런데다 좋은 외모에 항상 예의 바르고 우아하게 행동하여 사람들의 호감을 샀습니다.
그러한 그의 성품처럼 그의 작품도 우아하고 아름답습니다. 라파엘로는 르네상스의 3대 거장이지만 레오나르도나 미켈란젤로보다 어렸습니다. 그는 레오나르도의 작품을 접하고 명암법이나 구도를 배우고, 미켈란젤로의 작품을 접하고 선의 움직임을 모방하는데 이것에 그치지 않고 자기만의 것으로 조화롭게 발전해 나아갔습니다.
어쩌면 라파엘로의 성품처럼 그의 작품도 모나지 않고 좋은 것들을 받아들이고 조화롭게 사용하여 더 우아하고 아름다운 작품으로 완성해 나아간 듯 보입니다. 그의 작품은 조화로우며 섬세함이 돋보이고 보는 이로 하여금 평온함을 느끼게 합니다. 생이 짧았으나 성품이 좋고 사람들에게 호감을 사 작품 의뢰가 많다 보니 많은 작품을 남겼습니다. 그의 작품은 고전 미술의 완성이라 할 수 있으며 르네상스의 절정을 보여줍니다.
삶과 예술
라파엘로 산치오는 1483년 4월 6일 우르비노 공국의 우르비노(이탈리아 마르케 우르비노)에서 조반니 산티와 마자 디 바티스타 차를라 사이에서 태어납니다. 아버지가 궁정에 소속된 미술가이자 시인이어서 라파엘로는 어릴 때부터 부친의 작업실에서 그림을 배웁니다. 우르비노는 당시 예술의 중심지 중 하나였고 아버지가 회화적인 부분 외에도 인문학적 지식을 갖추고 있어 라파엘로가 예술적 배움을 취하기에 좋은 환경이었습니다. 1491년 어머니가 동생을 낳다가 사망하고 아버지는 재혼을 하는데 1494년 아버지도 사망합니다. 당시 11세의 라파엘로는 아버지의 작업장을 아버지의 제자에게 맡기고 그의 도움으로 피에트로 페루지노의 공방에서 도제이자 조수로 활동합니다. 조수로서 페루지노와 함께 벽화를 그렸으며 1500년에 교회 예배당 제단화 의뢰를 맡게 되는데 이때부터 자립화가로 인정받고 활동합니다. 라파엘로의 이름이 서서히 알려져 여러 일을 의뢰받게 되는데 우르비노 공작 가문이 라파엘로를 후원해 줬으며 라파엘로는 우르비노 공작 가문 사람 외에도 여러 사람들과 친분을 맺었습니다. 페루자의 성당에 <성모의 대관식>, <동정녀 마리아의 결혼식>을 남겼습니다.
1504년 피렌체에서 레오나르도와 미켈란젤로의 대결 소식에 배움을 얻기 위해 피렌체로 떠납니다.
피렌체에서 개인 고객을 상대로 성모와 성가족, 초상화 등을 작업하며 레오나르도의 기법을 연구하여 흡수하고 자기만의 기법으로 만들어 나갔습니다. 미켈란젤로의 역동성도 조금씩 흡수하여 부드러운 입체감이 우아하고 힘 있게 조화를 이루게 됩니다.
1508년 교황 율리우스 2세의 부름으로 로마에 가서 바티칸 궁의 교황의 집무실을 작업하고 큰 명성을 얻게 됩니다.
성직자와 지식인, 귀족들의 의뢰가 빗발쳐 제자를 두고 그림을 그렸으나 주문의 양을 감당하기 힘들었다고 합니다.
교황 율리우스 2세가 사망하고 후임 교황 레오 10세도 라파엘로를 인정하여 작업 의뢰를 계속했으며 1514년 성 베드로 대성당의 건축 책임자로 라파엘로를 임명합니다. 가톨릭교회에 기여한 공으로 교황 훈장을 받습니다.
프레스코화인 <성체 논의>와 <아테네 학당>등이 유명하며 <어느 추기경의 초상>, <토마스 잉기라미의 초상>, <폴리뇨의 성묘>,<갈라테아의 승리> 등의 걸작을 남겼습니다. 1519년 아리오스토의 희곡 <바뀌어진 아이들>의 무대 설계를 했고 1520년 8일 동안의 고열을 앓다가<그리스도의 변용>을 유작으로 남기고 37세 생일에 사망합니다.
유해는 로마 판테온에 안장되었습니다.
라파엘로는 이탈리아 회화의 절정을 보여줬으며 완벽하게 균형 잡힌 구도, 섬세한 표현, 우아한 선과 기품 있는 인물 표현으로 르네상스의 고전적인 양식을 완성했습니다.
연인
라파엘로는 상당한 미남으로 당시 여성들에게 인기가 많았다고 하는데 죽을 때까지 독신이었습니다. 결혼은 안 했지만 라파엘로에겐 마르게리타 루티라는 정부가 있었는데 많은 작품의 성모 마리아 모델은 마르게리타라고 추정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마르게리타를 많이 사랑한 것으로 보이는데 그녀와 결혼하지 않은 것은 라파엘로와 친하게 지냈던 비비에나 추기경의 조카인 마리아 비비에나와 1514년 약혼을 했기 때문입니다. 변변치 않은 집안의 마르게리타와의 관계를 세상에 드러낸다면 추기경과의 관계도 잃을 수 있고 교황청의 신임도 잃을 수 있었기 때문에 결혼을 미루고 마르게리타와의 관계를 유지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라 포르나리나>는 그녀에게 마음의 징표로 그린 그림인데 왼쪽 팔에 팔찌에 라파엘 우르비노이라는 글자가 있습니다. 원본에는 반지도 있었는데 요절한 라파엘로의 명예를 지킨다는 명목으로 제자들이 반지는 그림에서 지웠다고 합니다. 약혼자인 마리아 비비에나는 라파엘로가 죽은 1520년 같이 사망했으며 마르게리타 루티는 라파엘로 사망 후 수도원으로 들어가서 얼마 지나지 않아 일생을 마쳤다고 합니다.
라파엘로 산치오는 짧은 생애였으나 많은 작품을 남겼는데 이를 보면 그가 얼마나 열심히 작품에 매진하였는지 얼마나 그 일을 사랑하였는지 알 수 있습니다. 조화로운 아름다움의 극치를 보여준 라파엘로 산치오는 고전 미술의 위계에서 가장 높이 평가되고 높은 영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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