렘브란트 하르먼손 반 레인(Rembrandt Harmenszoon van Rijn) /
1606년 7월 15일 ~ 1669년 10월 4일(향년 63세)
- 네덜란드 황금시대의 대표화가
렘브란트에 관해 알아 보겠습니다 -
작품세계
17세기 네덜란드는 스페인과의 독립 전쟁에서 승리해 개신국 공화국이 됩니다. 이때를 네덜란드의 황금시대라고 하며 네덜란드의 역사에서 무역, 과학, 군사, 그리고 미술이 세계에서 가장 빛나던 시대였는데 이 중심에 렘브란트가 있습니다.
렘브란트는 네덜란드의 화가로 바로크 시대를 대표하는 화가이며 유럽 미술사에서 위대한 화가이자 판화가로 알려져 있습니다. 특히 네덜란드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화가인데 예술 분야에서 '네덜란드의 황금시대'라고 부르는 시대를 불러오는데 기여했습니다. 자의적으로 빛과 어둠의 강한 대비를 만들어 대상을 표현한 것이 특징이며 정교한 구도와 인물의 탁월한 묘사로 오묘한 인간의 감정을 담아내고자 했던 점이 높이 평가됩니다. 그는 해외에서 활동하지는 않았지만 이탈리아의 거장들과 네덜란드 예술가들의 작품에 상당한 영향을 받았으며 초상 화가로 일찍이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그는 역사화, 초상화, 풍경화 등 다양한 주제를 다루었으며 유화, 판화, 드로잉 등 회화를 통해 빛의 화가라고 불릴만한 수많은 걸작을 남겼으며 빛으로 조명된 자신만의 예술세계를 만들어 냈습니다.
굴곡진 삶
렘브란트 하르먼손 반 레인은 1606년 7월 15일 네덜란드 레이던에서 제분업자의 아홉째 아들로 태어납니다. 어릴 적 그의 가정 형편은 제분업자인 아버지 덕에 넉넉한 편이었습니다. 어머니는 가톨릭 신자였으나 아버지의 영향으로 렘브란트는 개신교 신자가 됩니다. 라틴어를 가르치던 학교를 나온 후 14세에 레이던 대학교 인문학부에 입학하는데 공부보단 예술에 흥미를 느낍니다. 그의 부모는 화가 야코프 판 스바넨뷔르흐 밑에서 3년간 미술 수업을 받게 합니다. 이후 암스테르담의 가장 유명한 역사 화가 피터 라스트만에게 6개월간 그림을 배운 뒤 1626년 고향 레이던에 개인 작업실을 열고 화가로서의 삶을 살아갑니다. 렘브란트는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거장들과 카라바조 등 이전 시대의 화가에게서 영향을 받아 빛과 어둠의 강한 대비를 주어 화면을 구성하는 키아로스쿠로 기법을 능숙하게 사용했습니다. 당시 네덜란드는 다른 유럽의 국가와 다르게 왕이나 귀족이 아닌, 상업으로 부를 쌓은 부르주아 계급이 활발히 활동하던 나라였으며 성공한 상인들을 위한 초상화의 수요가 많았습니다. 이런 환경에서 빛과 어두움을 능숙히 다루며 인물에 대한 훌륭한 묘사를 보여주는 그의 화풍은 인기를 끌 수밖에 없었습니다. 1631년 가을 암스테르담으로 거처를 옮기고 초상 화가의 일인자가 됩니다.
1632년 암스테르담 의사협회에서 의뢰한 <튈프 박사의 해부학 강의>는 그룹 초상화로 인물들을 극적으로 배치시키고 생생한 표정을 담아내어 기존의 초상화와 다른 구성을 보여주는데 이로 인해 명성이 높아집니다.
이때부터 10여 년간 렘브란트는 빛나는 삶을 살아갑니다. 명문가의 딸 사스키아 판 오이렌부르흐와 결혼하고 초상 화가로 명성이 높아져 엄청난 의뢰를 받았고 많은 제자들을 거느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렘브란트는 평면적 초상화로 만족하지 못하였고 점차 내면을 표현하고자 하여 종교적 신화적 소재를 따라 그리거나 자화상이 많아졌으며 이때부터 세속적 성공과 멀어지게 됩니다. 1642년 <야경>을 제작했으나 당시 나쁜 평을 받아 초상 화가로서의 명성을 잃게 됩니다. 게다가 같은 해 아내 사스키아가 세상을 떠나 실망과 슬픔에 빠지게 되었으나 두 번째 아내 헨드리케의 내조를 받아 작품 세계가 더욱 발전하고 과감해집니다. 활동 말기로 갈수록 제작하는 작품 수가 줄었음에도 사치스러운 생활과 개인 소장용 미술품을 계속 사들이다가 1656년 공식적으로 파산 선고를 합니다. 그가 살던 호화로운 저택과 미술품들은 경매로 처분되고 유대인 지역에서 가난에 시달리는 생활을 하게 됩니다. 1663년 죽은 아내 사스키아 대신 아들 티투스를 키워주고 딸 코르네리아를 낳았던 헨드리케도 죽고 1668년에는 아들 티투스 세상을 떠납니다. 렘브란트의 경제적 어려움은 더욱더 심해지고 가족과 재산과 명예를 읽었지만 그림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는 붓, 분필, 에칭용 조각칼 등을 사용해 인간의 형상과 감정을 정교하게 묘사했으며 자신을 둘러싼 세상을 관찰하고 표현했습니다. 특히 자신의 모습을 여과 없이 그려 흥망성쇠를 담고 있는 렘브란트 본인의 초상화는 훗날 그를 다시금 조명하게 하는 계기가 됩니다. 1669년 자신을 화가로 묘사한 최후의 자화상을 그리고 유대인 구역의 허름한 집에서 쓸쓸히 눈을 감습니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튈프 박사의 해부학 강의>, <돌다리가 있는 풍경>, <야경>, <세 개의 십자가>, <밧세바>, <황금 투구를 쓴 남자> 등이 있으며 1639년부터 1660까지 그가 살던 저택은 1911년 렘브란트 박물관으로 일반인들에게 공개됩니다.
네덜란드 황금시대의 대표 화가 렘브란트는 17세기 최고의 화가로 손꼽히며 유럽 회화 역사상 가장 훌륭한 화가로 알려져 있습니다. 굴곡진 삶 속에서도 작품 활동을 계속하여 그의 작품은 더욱 발전해 나갔으며 인간애가 담긴 그의 작품은 시대를 초월해 미술 역사에 깊게 자리 잡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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