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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가 이야기

신고전주의 자크 루이 다비드

by 아트랑 2024. 4.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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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크 루이 다비드 / 알프스 산맥을 넘는 나폴레옹 (1801년)

 

 

 

 

자크 루이 다비드(Jacques-Louis David) / 1748년 8월30일 ~1825년 12월29일(향년77세)

 

 

- 신고전주의의 거장 자크 루이 다비드에  관하여 알아보겠습니다 -

 

 

 

작품 세계

 

신고전주의는 18세기 말 프랑스를 중심으로 유럽에서 발전한 미술 사조로 고대 그리스와 고대 로마의 문화에 영향을 받았습니다. 고전 고대의 부활을 목표로 고고학적 정확성과 합리주의적 미학에 바탕을 두었는데 왕족과 귀족 중심의 바로크나 로코코 미술에 대한 반발이 신고전주의가 발달하는 토대가 되었습니다.

 

자크 루이 다비드는 프랑스 신고전주의의 대표이며 탁월한 화가였습니다. 그는 회화에서 형태와 어두운 색조, 현실과 이상을 우아하게 결합시켜 고전주의를 완벽히 재창조했습니다. 미술에 관심이 없어 그를 잘 모르는 이도 그의 걸작 몇몇은 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 정도로 많이 알려진 그림을 그렸음에도 정치적 성향을 미술에 입혔기에 예술계 쪽에서 그를 앞에 세우지는 않는 듯합니다. 그는 신화, 성경, 역사적 사건 등 고전적 내용을 담아 당시 사회를 비판했습니다. 신고전주의는 고전적 내용, 역사적 내용, 엄숙함, 공공을 위해 개인을 희생하는 모습, 애국심, 영웅적 모습 등을 강조하는데 그는 애국 사상의 뛰어난 표현으로 유명했었습니다. 고대 조각과 같이 조화와 질서를 존중하고 장대한 구도와 세련된 선으로 형태미를 완성했는데 신고전주의 양식의 진보와 함께 미술의 방향에 변화를 주도했습니다. 그런데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자 왕정에서 받은 영예를 던지고 급진파 자코뱅에 가입해 혁명에 깊게 관여하다 궁전에 유폐됩니다. 후에 나폴레옹 집권 후 복권되는데 궁정화가로 임명되어 나폴레옹의 활약에 그의 모습을 로마풍의 신고전주의를 투여하여 신화 속 영웅의 모습으로 사실보다 과장되게 그립니다. 다비드는 프랑스에서 예술적 정치적으로 미술계 최대 권력자가 되어 화단에 많은 영향을 끼칩니다. 그리고 점차 정치에 참여하게 되고 미술 또한 권력에 의해 포장되어 표현한 부분이 엿보입니다. 그러나 그가 미술사적 영역에서는 중요한 인물이기도 하며 뛰어난 화가임은 틀림없습니다.

 

 

 

 

생애

 

자크 루이 다비드는 1748년 8월 30일 프랑스 파리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납니다. 어릴 때부터 책을 읽거나 그림을 그리는 것을 좋아했던 다비드는 1766년부터 화가 조제프 마리 비앵의 화실에서 미술 교육을 받습니다. 당시 로코코 미술의 대가인 프랑수아 부셰가 교장으로 있던 왕립 미술 아카데미에서도 수업을 받습니다. 1774년 로마상을 획득하고 1775년부터 1780년까지 로마에 머무르면서 고전미술을 연구합니다. 로마에서 보낸 이 기간은 다비드의 회화 양식 기반과 발전에 영향을 준 중요한 시기였습니다. 1780년 파리로 돌아와 왕립 미술 아카데미의 정회원이 되어 1781년 고전주의 양식의 <자비를 기원하는 벨리사리우스>를 제작 살롱에 출품합니다. 이후 루이 16세로부터 루브르 궁전의 아틀리에에서 생활할 권리를 얻는 영예를 얻고 성공한 미술가가 됩니다. 부인 마르게리트 샤를로트와 결혼하고 50명 이상의 제자를 두고 많은 돈을 번 것도 이 시기입니다. 정부에게 호라티우스의 그림 의뢰를 받고 1784년 로마에 가서 <호라티우스의 맹세>그리는데 이 작품은 그의 고전 연구의 성과를 나타내는 명작으로 꼽힙니다.

 

프랑스 혁명(1789년)이 일어나자 로베스피에르의 친구였던 다비드는 왕정에서 받은 영예를 던지고 급진파였던 자코뱅에 가입합니다. 그는 1794년 혁명정부였던 국민공회의 의장까지 올라 혁명에 깊게 관여하는데 권력을 잡은 로베스피에르는 공포정치를 펼칩니다. 이에 반동이 일어나 로베스피에르가 숙청 당하고 다비드는 뤽상부르 궁전에 유폐되었다가 1799년 나폴레옹의 집권 이후에 복권됩니다. 나폴레옹의 총애를 받아 궁정의 수석 화가가 되어 예술적 정치적으로 미술계 최대의 권력자가 되어 많은 영향력을 행사합니다. 그러나 1816년 나폴레옹 퇴위 후 벨기에 브뤼셀로 망명하였고 1825년 12월 30일 77세의 나이에 브뤼셀에서 숨을 거둡니다.

대표작으로는 <호라티우스의 맹세>, <소크라테스의 죽음>, <테니스코트의 서약>, <마라의 죽음>, <사비니의 여인들>, <알프스 산맥을 넘는 나폴레옹>, <황제 나폴레옹 1세의 대관식>, <테르모필라이의 레오니다스> 등이 있습니다.

 

자크 루이 다비드는 왕정부터 프랑스 혁명의 자코뱅 정부, 나폴레옹 정부의 모든 시대의 거물 미술가로 있었습니다.

어찌 보면 그가 그런 자리에 있었기에 프랑스 문화를 보호 보존할 수 있었고 키워낼 수 있었으며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시대가 끝나고도 프랑스 파리는 유럽 예술의 중심지로 굳건할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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