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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가 이야기

낭만주의의 선구자 제리코

by 아트랑 2024. 5.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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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오도르 제리코 / 메두사호의 뗏목 (1819, 루브르 미술관)

 

 

테오도르 제리코(Théodore Géricault) / 1791년 9월 26일 ~ 1824년 1월 26일(향년32세)

 

 

 - 프랑스 낭만주의 미술의 선구자인

테오도르 제리코에 관해 알아보겠습니다 -

 

 

 

작품 세계

 

테오도르 제리코는 낭만주의 회화의 창시자로 프랑스의 대표 화가입니다.

서양 미술사에서 낭만주의는 신고전주의에 대한 반발로 등장한 미술이라고 소개되는데 신고전주의와 낭만주의 미술은 17세기 후반부터 유럽에 불어온 계몽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계몽주의가 일깨운 것은 미신과 종교의 힘을 거부하고 비합리적인 정치와 제도를 혁명으로 바로잡으려는 이성적 인간에 있습니다. 그러나 피로 쟁취한 혁명에서 인간의 광기와 두려움이 드러나고 이성과 합리성에 대한 믿음이 무너지며 인간 내면의 직관과 감성, 상상력에 눈을 돌리게 됩니다. 19세기 고전주의가 우세하던 프랑스에서도 낭만주의의 바람은 여지없이 흘러들어오는데 테오도르 제리코의 <메듀사의 뗏목>이라는 작품을 통해 프랑스의 낭만주의 미술이 등장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 당시 사회를 비판하는 민감한 주제와 강한 명암과 색채, 대담한 구도, 박진감이 흐르는 정경은 그때까지의 회화에서는 볼 수 없던 극적 요소로 가득했습니다. 이 작품 이후로 많은 화가들이 인간의 드라마를  주제로 한 그림을 선보이며 낭만주의라는 새로운 화풍이 생겨났으며 그는 짧은 생애 동안  인간의 어리석음과 공포, 광기, 죽음 같은 주제에 몰두함으로써 프랑스 낭만주의 미술의 선구자적 역할을 했습니다.

 

32세의 짧은 생이었지만 그의 명성은 대단하여 당시 후배 화가들은 그를 '낭만주의의 화신'이라 부르며 숭배하였고 사후 많은 화가들에게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의 작품은 자유롭고 개인주의적인 특징을 보였으며 당시의 진보적 가치에 적극 참여하고 인류 보편의 관심사가 되는 이야기를 표현하였습니다.

 

 

 

생애

 

테오도르 제리코는 1791년 9월 26일 프랑스 북서부 루앙에서 외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변호사였고 어머니는 담배 제조업에 종사하는 집안 출신이었습니다. 제리코가 4세 되던 해 아버지가 외가 쪽 담배사업 관련 일을 맡게 되면서 파리로 이주했습니다. 부모의 사업은 번창했고 제리코는 과거 귀족들이 주로 살던 곳에 거주하며 최고의 학교인 리세 앵페리알과  에콜 데 보자르에 다니며 미술 공부를 했습니다. 이 당시 프랑스 사회의 중심 계급은 부르주아 계급이었는데 제리코는 성공한 부르주아 계급의 삶을 살게 됩니다.

전쟁 중이던 제정 말기 징집 대상이 되자 돈으로 대신 군대 갈 사람을 샀고 왕정이 복고된 후에는 왕립 총사대에 들어가 귀족의 자재들과 함께 하기도 했습니다.  부모가 일찍 돌아가시지만 유산을 모두 물려받아 평생 돈 걱정 없는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그는 위험에 도전하고 힘과 용기를 과시할 수 있는 남성적인 일을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승마를 할 때도 가장 거칠고 사나운 말만 골라 타곤 했으며 평생에 걸친 그림의 중심 주제도 말이었습니다. 그가 첫 미술 선생으로 베르네를 선택한 이유도 그가 말 그림을 잘 그리는 화가였기 때문이었습니다. 1808년부터 베르네 화실에서 수업을 받은 후 1810년에는 역사화를 그리던 화가 게랭의 화실에 들어가 1811년 게랭의 학생으로 에콜 데 보자르에 등록합니다. 제리코는 4년간 루브르에 자주 가서 르네상스와 바로크 대가들의 작품을 모사하며 자신의 개성을 만들어 갑니다.

 

1812년 21살의 제리코는 <돌격하는 샤쇠르>으로 살롱에서 금메달을 받으며 화단에 데뷔합니다.

1814년 <전장을 떠나는 부상당한 흉갑기병>을 그리고 왕실 총사대에 들어갔다가 군대에 환멸을 느끼고 총사대에서 나와 다시 그림에 몰두합니다. 1816년 로마상 경연에 응시하여 로마 유학의 기회를 잡으려 했으나 시험에 떨어지고 자비로 이탈리아로 여행을 떠납니다. 이탈리아 대가들의 작품을 공부하고 돌아와 1819년 <메두사호의 뗏목>으로 다시 메달을 받습니다. 이 그림은 실제사건을 소재로 하였는데 프랑스 정부에 의해 부당하게 은폐되었던 선박 침몰사고를 사실주의에 고전주의적 장엄함을 결합하여 그려내었습니다. 이 작품은 프랑스 낭만주의 확립의 출발선이 됩니다. 혼신의 힘을 쏟았던 대작이 살롱에서 찬반이 엇갈린 반응이 나오자 1920년 영국을 순회하며 전시를 하고 호평을 받습니다. 그러나 일찍부터 폐를 앓은 그는 영국의 기후로 몸이 나빠졌고, 1822년 세 번의 승마 사고와 척추 종양으로 수술을 받게 됩니다. 잠시 건강이 회복되는듯했으나 1823년 종양이 재발하여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1824년 1월 사망합니다. 말년의 질명과 불운 속에서 정신과 의사의 의뢰로 광인 초상화들을 남기는데 냉정한 사실주의로 평가됩니다. 그의 생이 짧았기에 알려진 주요작은 많지 않으나 알려지지 않았던 작품들도 사후 화가들에게 영향이 컸고 낭만주의 화가들이나 사실주의 화가들에게 지속적 영향을 끼칩니다.

 

프랑스 낭만주의 미술의 선구자인 제리코의 삶도 낭만주의와 닮아있습니다. 낭만주의 미술은 개성을 존중하고 정서적으로 자유를 구하며 지성보다 감정을, 객관보다 주관을 중시했습니다. 또한 형식보다 표현이 먼저이며 형태보다 있는 그대로의 생생한 느낌, 색채를 우선시하며 아름다운 것만이 아니라 추한 것까지도 그려내었습니다. 그 당시의 상황에 예술가로서 편한 길을 선택할 수도 있었으나 사회 비판적 시선으로 불편한 주제를 선택하고 열정과 혼신의 힘을 다해 자신의 예술혼을 불태운 제리코는 낭만주의 미술의 위대한 예술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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