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프랑수아 밀레(Jean-François Millet) / 1814년 10월 4일 ~ 1875년 1월 20일(향년60세)
- 자연주의 화가 장 프랑수아 밀레에 관하여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
작품세계
장 프랑수아 밀레는 프랑스의 화가로 프랑스의 바르비종이라는 지역을 중심으로 사실적 풍경화를 자주 그렸던 화가들의 모임인 바르비종파의 창립자 중 한 사람입니다. 자연주의 혹은 사실주의 화가로 불리는데 자연주의란 자연을 이상화 하거나 우화의 배경으로 여기던 관습에서 벗어나 자연 그대로를 관찰하고 그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풍경화인데 다른 화가들과 달리 밀레는 농민 생활에 중점을 두고 그린 그림에 더 많았습니다. 숲이나 자연풍경을 주로 그렸던 다른 바르비종파 화가들과 달리 농민의 풍경에 사실적 묘사와 종교적 분위기를 연출하는 등 독특한 화풍을 추구하였습니다. 화가 자신이 농부이기도 했기에 그의 그림은 농사짓는 사람들의 어려움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마음이 드러나며 힘든 농민들의 생활이지만 아름답고 평화로우며 때론 경건하게 표현하기도 하였습니다.
밀레는 바르비종에서 사실주의적 풍경화를 확립하는데 이러한 화풍은 프랑스 풍경화의 기반이 됩니다. 그는 데생과 동판화도 뛰어나 많은 작품을 남겼습니다. <이삭 줍는 여인들>, <만종>, <씨 뿌리는 사람들> 등 농부들의 일상을 그린 작품들이 유명하며 프랑스 혁명 이후 혁명의 상처를 치유하고 산업화가 한창이던 시기였기에 사회주의자들에게 찬사를 받았지만 보수주의자로부터는 비판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의 그림은 고전적인 바탕위에 두드러지게 사실적 세부 묘사가 어우러지는 특징을 가졌으며 사실주의, 인상주의, 후기 인상주의 화가들에게 영향을 끼쳤습니다.
귀농 화가
장 프랑수아 밀레는 1814년 노르망디의 그레빌 아그에 있는 작은 마을 그뤼시에서 농부인 장 루이 니콜라와 에메 앙리에트 아델라이드 앙리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납니다. 이곳은 농업이 주된 삶이었기에 어린 시절부터 농부들의 삶을 관찰하며 크게 됩니다.
1833년 그림에 소질이 있다는 것을 인정한 아버지는 그를 셰르부르의 초상화가 폴 뒤무셸에게 보내 그림을 배우게 합니다. 1835년 밀레는 앙투안 장 그로의 제자 뤼시앵 테오필 랑글루아에게 정식으로 그림 수업을 받고 1837년 랑글루아와 다른 이들이 밀레에게 준 장학금으로 파리로 이사합니다. 그리고 에콜 데 보자르에서 폴 들라로슈에게 그림을 배우며 루브르 박물관에서 니콜라 푸생의 작품을 연구합니다.
1839년 장학금도 종결되고 가난한 생활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살롱전에 입상해야 하는데 제출한 그의 작품은 거절당합니다. 1840년 그의 첫 초상화가 파리 살롱에 전시되자 셰르부르로 돌아가 초상화가로 개업합니다. 다음 해 폴리 비르지니 오노와 결혼하나 생활이 어려워 다시 파리로 나와 초상화 외에도 간판, 누드화까지 그리며 생활해야 했습니다. 아내가 결핵에 걸렸기에 약값을 벌기 위해서였습니다. 1843년 파리 살롱에서 작품 전시를 거절당하고 아내가 결핵으로 사망하자 밀레는 셰르부르로 돌아갑니다.
한동안 그림을 그리지 못했던 밀레는 카드린 르메르를 만나고 캔버스 앞에 다시 서게 됩니다. 1845년 카트린 르메르와 르아브르로 이사하여 초상화와 풍경화 등을 그리며 몇 달을 보내다가 다시 파리로 이사합니다.
1848년 <곡식을 키질하는 사람>으로 살롱에 당선되면서 주목을 받기 시작하여 1849년 작은 마을 바르비종에 정착해 직접 농사일을 하며 농민생활의 모습과 자연 풍경 그리고 노동의 의미를 화폭에 담았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보아왔던 농촌의 모습과 노동의 고단함을 알기에 깊은 연민의 감정과 노동자 계층의 고난을 표현하고자 했습니다.
바르비종으로 정착으로 테오도르 루소, 카미유 코로 등과 함께 친교를 맺고 바르비종파가 창립되었고 루소와는 깊은 우정을 나눕니다. 1850년 파리 살롱에 <씨 뿌리는 사람>을 전시하게 되어 귀농 화가로서 확실한 작품 방향을 보여줍니다.
1850년부터 1853년까지 작업한 <추수하는 사람들의 휴식시간>은 파리 살롱에서 2위를 하며 공식적인 명예를 쌓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가난으로 여비가 없어 키워 주신 할머니의 장례식도 어머니의 장례식도 참석하지 못했던 밀레는 고향에 다녀옵니다. 그리고 카트린 르메르와 결혼식을 올리고 그의 여생을 그녀와 함께 합니다. 그녀와의 사이에는 9명의 자녀를 두게 됩니다.
그는 계속해서 가난과 함께였지만 신념을 굽히지 않고 농민의 모습을 소박하고 아름답게 표현하였습니다.
1857년 <이삭 줍는 여인들>로 살롱전에 출품하는데 이로 인해 명성을 얻게 되고 많은 그림 주문이 들어옵니다. 이런 밀레의 명성이 미국에까지 알려져 미국 보스턴 출신의 화가의 의뢰로 밀레의 대표작 중 하나인 <만종>이 탄생합니다. 이후 밀레는 승승장구합니다.
말년에는 사회적으로 인정받아 화가로서의 영광을 누렸으며 1868년 프랑스 최고 훈장인 레종 도뇌르 훈장을 받고 1870년 파리 살롱의 심사위원으로 채택됩니다. 상업적 성공과 공식적인 명성, 많은 그림 의뢰를 받고 작품 활동을 했으나 건강 악화로 더 이상 작업을 할 없게 됩니다. 그리고 가난할 때 얻은 결핵이 원인이 되어 1875년 1월 20일 숨을 거둡니다.
그의 작품들은 훗날 빈센트 반 고흐와 카미유 피사로에게 큰 영향을 줍니다.
젊은 시절부터 그림을 쉬지 않고 그렸으나 늘 가난과 함께 했었던 장 프랑수아 밀레.
그는 농촌에서 태어났고 농촌으로 귀농하여 농민의 삶을 살았기에 누구보다 농촌의 삶을 이해하고 표현할 수 있었습니다.
하층 계층인 농민을 통해 땅을 일구며 살아가는 자연 순환적인 인간의 모습과 삶, 그리고 아름다움을 담을 그의 작품은 서정적이며 보는 이들에게 평온함을 느끼게 합니다.
주요 작품으로는 <씨 뿌리 사람>, <이삭 줍는 여인들>, <만종>, <걸음마>, <봄>, <우유 짜는 여인>, <저녁 기도>, <괭이 가진 남자>,<젊은 어머니와 아기>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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