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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가 이야기

오딜롱 르동 몽환적 내면 세계

by 아트랑 2024. 5.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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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딜롱 르동 / 무한대로 여행하는 이상한 풍선과 같은 눈(1878년 / 뉴욕 현대 미술관)

 

 

 

 

오딜롱 르동(Odilon Redon) / 1840년 4월 20일~1916년 7월 6일(향년 76세)

본명: 베르트랑 장 르동( Bertrand-Jean Redon)

 

 

 

- 프랑스의 상징주의 화가 오딜롱 르동에 관하여 알아보겠습니다 -

 

 

작품세계

오딜롱 르동은 상징주의 미술의 선구자로 평가받는 프랑스의 화가입니다.

19세기 눈에 보이는 그대로의 세계, 일상의 재현과 자연에서 오는 순간의 인상을 표현한 인상파가 주를 이루던 시기에 그들과 달리 눈에 보이는 실체 표현이 아니라 머릿속으로 생각하고 느껴지는 모호한 세계를 암시적으로 표현하였습니다. 그는 인간 내면의 세계, 공상과 감정의 세계를 신비롭고 몽환적으로 시각화하여 그만의 독창적인 화풍으로 발전시켰습니다.

 

그는 초반에는 목탄과 석판화만을 사용해 누아르(검은색)라 불리는 작품들을 제작했는데 기이한 느낌의 생명체나 사물들을 등장시켜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상징적으로 표현하려 했습니다. 문학, 과학, 생물에 관심이 많았고 신화나 종교적인 내용이나 문학 작품에서 영감을 많이 얻었는데 색을 사용하고 나서부터는 어둡고 우울한 느낌에서 평온하고 고요한 느낌으로 작품이 바뀝니다. 그러나 신비롭고 암시적으로 표현하며 외부보다는 내면과 본질에 우위를 두는 그의 상징주의적 미학은 변함없이 계속되었습니다. 꽃 그림을 주제로 한 그림에서도 보색을 사용한 화려한 색채 감각으로 강렬한 리듬감을 가졌으나 공간의 개념이 없는 비현실적인 모습을 표현하였습니다.

그의 작품은 나비파에게 영향을 주었고 훗날 초현실주의 미술의 토대가 되었으며 후대 화가들에게도 깊은 영향을 줍니다. 1903년 레종 도뇌르 훈장을 받고 말년에 큰 인기와 후배들의 존경을 받습니다.

 

 

 

삶의 변화와 작품의 변화

 

1840년 프랑스 남부 보르도에서 출생한 오딜롱 르동은 태어난 지 며칠이 지난 후 프랑스 메독 지방의 가족 소유 농장으로 보내져 외삼촌과 하인들의 손에 키워집니다. 그의 집은 부유했으며 르동 위에 형이 있음에도 갓 태어난 르동을 보낸 것은 르동의 건강 문제인 것으로 보여집니다. 르동은 자주 찾지 않는 부모를 기다리며 11세까지 농장에서 지냈는데 그곳에서 외로움과 고독의 감정을 느끼고 이런 어린 시절의 비관적 감정들은 그의 작품에서 많은 자리를 차지하게 됩니다.

 

1851년 보르도로 돌아와 학교 교육을 받기 시작했으나 음악, 미술, 문학 외에는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1855년 수채화가 스타니슬라스 고랭에게 그림을 배우며 본격적으로 그림 공부를 합니다. 식물학자 아르망 클라보와 친교를 나누며 동식물과 미생물에 관심을 갖게 되고 문학에도 관심을 갖게 되며 이는 누아르 회화가 완성되게 된 원천이 됩니다.

 

1864년 24세가 된 르동은 파리 에콜 데 보자르의 교수 제롬의 화실에 들어가 조각과 회화를 배웁니다. 그러나 몇 달 만에 그만두고 보르도로 돌아와 판화가 로돌프 브레댕을 만나 판화 기술 외에 표현의 자유라는 것을 배웁니다. 이에 따라 그의 작품에서 표현하고자 하는 주제와 상징성에 영향을 미치게 되고 그를 스승으로서 존경하게 됩니다.

 

그는 이미 보르도에서 조각과 에칭, 석판화 부문에서 탁월했으나 전쟁 참전 후 1871년 파리로 거처를 옮기고 목탄화와 석판화만을 제작합니다. 그리고 20여 년간 누아르(검은색)이라는 작품을 내놓습니다. 이러한 독자적인 작품 세계는 그의 유년기 시절에 느껴진 어두운 내면을 바탕으로 문학과 과학에서 받은 영감을 접목시켜 만들어지게 되었는데 내면의 새로운 상상의 세계를 몽환적이며 기묘하게 표현하였습니다. 그의 작품은 상징주의적 문학 작가들에 의하여 유명해집니다.

 

그런데 검은색만을 추구하던 그가 1890년 파스텔과 유화를 사용하기 시작합니다. 이런 다양한 색상을 사용하여 화려한 작품으로 변모한 이유는 무엇보다 결혼으로 인한 새로운 가족 형성이 큰 이유로 보입니다. 르동은 마흔이 다 되어 카미유 팔트라는 13세 어린 여인과 결혼을 합니다. 평소의 소극적인 그와는 달리 카미유에게 적극적으로 편지도 보내고 그녀와의 만남이 그에게 얼마나 큰 기쁨이고 행복인지 열정적으로 고백합니다. 결국 그의 구애에 1880년 카미유는 그와 결혼하고 르동은 행복한 시간을 갖습니다. 그런데 두 사람의 사랑으로 태어난 첫아이를 허무하게 잃게 되자 그는 깊은 우울증에 빠지게 됩니다. 1889년 둘째 아들 아리가 태어나자 르동의 우울증은 사라졌고 자신의 행복감을 작품에 화사한 색상으로 분출하기 시작합니다. 르동은 특정 신앙을 가졌던 적이 없지만 작품에 기독교, 불교, 힌두교 관련 도상이 등장하고 종교적 성향이 강했고 신화 주제 그림과 꽃 그림들은 더욱 화려한 색채를 사용하였습니다.

 

르동의 생애 중 마지막 20년의 작품들은 낙천적이고 밝은 빛이 넘치는 모습으로 표현되었습니다.

 1894년 심각한 병에 걸렸으나 잘 이겨내고 더 온화하고 낙천적인 작품 경향을 보입니다.

불우한 유년기를 보낸 르동의 그림은 어둡고 괴기하였으나 가정을 이룬 아내와 아들로 인해 심정 안정을 찾은 그의 그림은 같은 사람이 그린 것이 맞나 싶을 정도로 주제와 색상이 바뀌는 큰 변화가 옵니다.

평온하고 안정된 생활을 했고 후배들의 존경도 받던 르동은 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한 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다 아들을  못 보고 76세의 나이로 사망합니다.

주요 작품으로는 <웃는 거미>, <무한대로 여행하는 풍선과 같은 눈>, <감은 눈>, <부처>,<키클롭스>,<비너스의 탄생> 등이 있습니다.

 

오딜롱 르동 / 목이 긴 화병 속 들꽃 다발(1912년 /루브르 박물관)

 

 

상징주의

 

상징주의는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걸쳐서 프랑스를 중심으로 유럽 전역에 나타난 예술 사조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미술보다는 문학에서 주도적으로 전개되었는데 서구 사회에 만연한 물질주의와 과학, 이성적 사고 등에 대한 신뢰에서 벗어나 인간 내면의 세계, 상상력과 감각의 세계에 눈을 돌리라는 것입니다. 상징주의 미술은 특히 문학과 관련성이 강했는데 화가와 문학인들은 서로에게 영감과 영향을 주고받았습니다. 상징주의 미술가들은 신화와 전설, 불안과 공포, 죽음과 성, 꿈과 무의식과 같은 비물질주의적인 주제를 가지고 상징화하여 이를 표현하고자 했습니다. 또한 예술이 개인의 경험이나 주관적인 감정에 의해 해석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으며 보이지 않는 것과 알 수 없는 것을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식으로 드러내려 했습니다. 상징주의는 초현실주의와 추상미술에 영향을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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